2015년 2월 28일 토요일

빌립보서 1장 19절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 예수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provision of the Spirit of Jesus christ))

빌립보서 1장 19절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19 οἶδα γὰρ ὅτι τοῦτό μοι ἀποβήσεται εἰς σωτηρίαν διὰ τῆς ὑμῶν δεήσεως καὶ ἐπιχορηγία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

 ​넘치는 공급 : ἐπιχορηγίας (에피ㅎ코레기아스)

 '넘치는 공급'이라는 말은 단순히 헬라어를 직역한 것 '공급'에 용어설명상 '넘치는'이라는 수식어를 더한 것이다. 원문상의 단어 '에피코레기아스'는 그리스시대 유행했던 악극단의 단장이 소속 단원들의 모든 필요공급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당시 그리스 연극상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자들과, 무대 바로 아래 악극을 연주하는 연주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악극을 이끄는 단장은 악극단원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였다. 일단 어떤 사람이 악극단에 가입을 하면, 더이상 생활의 필요를 염려할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악극단장이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영의 공급은 사실상 넘치는 공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게 된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살고, 많은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바로 '그 영' 인데, 그 영은 모든것을 포함한 것이다. 이 영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부족함이 없고 항상 넘침으로 충만한 것이다. ​ 부가적으로 그럼 이 예수그리스도의 영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은 요한복음 7장 39절에 언급된 그 영이다. ​요한복음 7장 39절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꼐서 아직 영광그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그 영은 주님께서 육체가 되시기 전의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잉태와 출생과 관련하여 성령이시며, 인성과 십자가 아래서 인간 생활을 하신 예수의 영이며, 죽음과 부활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영이며, 이제 이 모든것을 포함하신 그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영 안에는 신성,인성,죽음,부활,생명 모든것이 복합된 영이다. 마치 출애굽기 30장 23절에서 25절까지에 나오는 복합적인 관유와 같은 것이다. "너는 또 가장 좋은 향료를 가져오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 향기로운 육계를 그 절반인 이백오십세겔,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에 따라 가져오고 올리브 기름 한 힌도 가져오너라. 너는 그것들로 바르는 거룩한 기름을 만들되, 향 만드는 사람의 제조법에 따라 잘 복합된 향기로운 관유를 만들어라. 이것이 바르는 거룩한 기름이 될 것이다." ​ 다양한 성분의 약품이 올리브ㅜ 기름 한 힌에 더해져 거룩한 관유가 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모든 성분이 이 그 영안에 녹아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영을 접할때 모든필요를 공급받게 된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써 받은 고난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가 맞은 매의 댓수와 돌에 맞은 횟수, 감옥에 같힌 횟수는 사도행전을 보면 잘 알수 있다. (단, 이 기록은 기록된 것일뿐, 실상은 그 이상이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위협과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많은 영적 유산들을 남길 수 있었던 해답은 바로 이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었다. 당신은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지쳤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가망없다고 말하지 말라. 단지 이 한포의 약을 먹으면 모든것이 해결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궁핍하지 않았고, 절대로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유했으며, 넘쳤으며, 심지어 남을 공급했다. ​ 바울이 천연적으로 강해서 이것을 인내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바울은 그 영을 의지 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주님의 인성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그 영을 따라 살고 행해야 한다.

 (ἐπιχορηγίας)와 동일한 단어가 쓰인 다른 성경구절을 참고적으로 소개한다.

 에베소서 4장 16절

 "온몸은 그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Ephesians 4:16 ἐξ οὗ πᾶν τὸ σῶμα συναρμολογούμενον καὶ συνβιβαζόμενον διὰ πάσης ἁφῆς τῆς ἐπιχορηγίας κατ’ ἐνέργειαν ἐν μέτρῳ ἑνὸς ἑκάστου μέρους τὴν αὔξησιν τοῦ σώματος ποιεῖται εἰς οἰκοδομὴν αὐτοῦ ἐν ἀγάπῃ.

2015년 2월 26일 목요일

로마서 8장 28절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룸)

로마서 8장 28절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름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압니다."

2015년 2월 25일 수요일

요한복음 6장 63절

요한복음 6장 63절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1)이십니다. 육체(2)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3)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to pneuma(1) estin to zwopoioun, h sarx(2) ouk wfelei ouden: ta rhmata(3) a egw lelalhka umin pneuma estin kai zwh estin.



 (1) 그영 pneuma(프뉴마:공기) ​

육체가 되신 주 예수님은 부활후에, 또한 부활을 통하여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에 분명히 언급된 것과 같이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에게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실 수 있으시다.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로 받아들일때,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영원한 생명을 분배하신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만, 우리가 얻는 분은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다.

 (2) 육체 sarx(샤륵스) ​

 여기서의 육체는 물질적인 몸의 살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내가 줄 떡은 곧 내 살인데(요6:51절) 라고 하자 그 다음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어려운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셔서 먹게 하려 하신 것은 자기 육체의 몸의 살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육체인 그 살은 무익하다. 결국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부활안에 계신 주님 자신이신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었다.


 (3) 말 rhmata(ㅎ레마타:즉각적인 말씀) ​

여기서의 말씀은 즉각적인 말씀, 지금 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것은 항상 있는 말씀을 가리키는 '로고스'(요1:1) 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씀은 그 영 다음에 나온다. 그 영은 살아 있고 실재하지만, 매우 비밀하고 만질 수 없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말씀은 구체적이다. 먼저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그 영'이 되실 것임을 언급하셨다. 그 후에 주님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명의 영의 체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주님은 부활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시며, 이 영은 그분의 말씀 안에 체현되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는 생명이신 그 영을 얻는다.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요한일서 2장 15절(세상은 아버지를 거스른다)

요한일서 2장 15절

"세상(1)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2)이 없습니다."



(1)세상

한국어 성경에 '세상'으로 번역된 원 헬라어 단어의 분류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체계인 물질적인 우주 : 마25:43/요17:15/행17:24/엡1:4/계13:8

2) 사탄이 부패시키고 강탈하여 그의 악한 세상 체계의 구성원들이 된 타락한 인류: 요1:29/3:16/롬5:12

3) 단장하는 것, 장식품: 벧전 3:3

4) 하나님의 대적 사탄이 세운 질서 있게 만든 체계: 요일 2:15/요15:19/요17:14/약4:4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땅에 살게 하신 것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강탈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그들을 정욕과 쾌락과 일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음식과 의복과 주택과 교통수단과 같은 생활필수품에도 빠지게 하고, 종교와 문화와 교육과 산업과 상업과 오락 등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체계화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탄적인 체계 전체가 악한 자 안에 놓여있다.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한 자를 이기는 근거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자에게 우리를 패배시키고 점유하도록 근거를 주는 것이다.



(2)아버지에 대한 사랑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이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또한 우리가 누린 그 사랑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은 아버지를 거스르고, 마귀는 아들을 거스르며(요일 3:8), 육체는 그 영을 거스른다.(갈 5:17)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쾌락이나 도덕적 부패는 악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 의복, 주택, 교통수단인 차 등을 관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것을 사탄이 만든 세상체계임을 밝힌다. 우리가 생활 필수품을 이용하는 것은 유용하다. 하지만 이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즉시로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빗나가게 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앗아가 버린다.(누구든지 두주인을 섬길수 없습니다.)마치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자 이것이 지팡이로 변한것처럼 세상을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잡으면 유용한 도움이 되지만, 뱀의 머리를 잡는순간 뱀에게 물리게 되는 것처럼, 세상이란 도구를 우리의 머리로 취하게 되는 즉시 세상에 빠지고 죄에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2015년 2월 22일 일요일

사도행전 20장 13절 ~ 38절 (바울의 마지막으로 영적 자녀들에게 전한말)


<바울이 밀레도로 가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만남>

사도행전 20장 18절 ~ 38절



18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줄곧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냈는지는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19 나는 모든 겸손과 많은 눈물로 노예로서 주님을 섬겼으며, 또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닥친 시련도 겪었습니다.
20 그리고 나는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중 앞에서나 이집 저집에서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가르쳤으며,
21 또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엄숙히 증언했습니다.

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영 안에 매이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내가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지만,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각 도시에서 나에게 엄숙히 일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내가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엄숙히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25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 가운데 두루 다니며 그 왕국을 선포하였으나, 이제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가 압니다.

26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는 것을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27 왜냐하면 내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의결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28 성령께서 여러분을 온 양 떼의 감독들로 세우셨으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
29 나는 압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올 것이며, 그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30 그리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건축할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이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어느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낸 적이 없으며,
34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이 두 손으로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습니다.

35 내가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고,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6 이 말을 하고 나서, 바울이 무릎을 꿇고 그들 모두와 함께 기도하니,
37 모두가 몹시 울며,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입 맞추고,
38 특히, 그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한 바울의 말에 마음 아파하며, 그를 배에까지 배웅하였다.

2015년 2월 21일 토요일

유월절의 참된의미 (pass over)


유월절이란..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구출되기전날 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에 바르고 양의 고기와 내장, 쓴마물등을 먹는 실행이 시작이 되었으며, 이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이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것에 따라 지금까지도 이스라엘민족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큰 절기이다. 또한 유월절을 시작으로 7일간 무교절이 지속되는데 이는 누룩이 없는 순수한 떡을 먹는 실행이며, 첫날인 유월절과 무교절의 마지막날에는 어린양을 잡고 떡을 만드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하는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유월절과 관련된 근거구절들


출애굽기 12:14

"이날은 너희에게 기념일이 되리니, 너희는 이 날을 여호와께 명절로 지내되 영구한 율례로 삼아 대대로 명절로 지내야 한다."


요한복음 1:29

"보십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요한복음 1:36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주의깊게 보고, "보십시오,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라고 하자."


베드로전서 1:19-20

19 "흠이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20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창세전에 미리 알고 계셨으나, 모든 시대의 마지막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3:8

"창세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거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2:1

"또 그 천사는 나에게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그 서의 길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2장, 요한복음에는 주님의 상과 관련된 상세한 기록이 없음.




유월절에 관한 기록은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사실 성경에서 유월절과 관련된 사상은 창세기 이전부터라고 할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창세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기록 때문이다. 사실 유월절에 잡혀진 어린양은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므로 구약에서의 유월절은 신약까지 계속되며 계시록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유월절은 구약에서 지켜야 했던 절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까지 지속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평생토록 지속되는 잔치인 셈이다.



이 유월절은 제정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마지막 재앙을 주시기 전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에 바르게 했는데, 문설주에 피가 발라진 집에는 죽음의 천사가 "유월"하여 장자의 죽음을 피할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정을 구분하지 못하셔서 그 표식을 바르도록 하셨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즉, 유월절은 하나의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구약은 예표요, 신약은 실재이다. 즉 구약은 그림자와 같고, 그 실체는 신약인 것이다. 구약의 유월절에서 나타나는 모든 실행과 긍적적인 것들은, 보통 신약에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따라서 유월절의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나타나고 그분이 흘린 피를 통해 우리가 구속을 얻고, 즉 그와 동시에 어린양의 피가 칠해진 사람, 곧 구속받은 믿는이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유월"된다. 또한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떠날 준비를 했다는 것은(허리띠를 매고 급히 먹으라고 했음) 믿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누려 힘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재정하신것은 이스라엘민족이 에굽을 용이하게 탈출토록 목적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월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기는 유월절에 대해 아주 상세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즉, 구약에서 상세히 묘사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신약을 살고 있는 우리는 마찬가지로 아주 상세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뿐 아니라, 섬세한 방식으로 그분을 누려야 한다. 




유월절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온일생동안 적용해야 할 절기)


베드로전서 1장 20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창세전에 아셨다고 한다. 즉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계셨고,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고, 우리로 그분을 먹고 힘을 내게 하셨으며, 먼훗날 새 예루살렘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새신자만을 위해 계시지 않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먹고 누릴수 있도록 하신다. 창세전부터 계시록 까지 유월절의 공과는 영원한 것이다. 유월절은 무교절의 첫날이며, 유월절포함 7일간은 무교절로 누룩없는 떡을 먹는 기간이다. 즉 7일간의 기간은 그리스도인의 평생을 뜻하며, 그 첫날인 유월절 구속받은 이후, 그분을 먹고, 또한 누룩없는 떡이신 그리스도를 평생 먹으며 지내는 것을 뜻한다.




구약의 유월절의 대치인 신약의 만찬상


사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저녁, 즉 그분이 재정하신 만찬상은 이제 유월절의 예표가 끝나고, 그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주님은 이 실행을 주님이 다시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되기를 원하셨다. 이 상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그분을 먹고 마시는 실행이다. 곧 이것은 유월절의 성취이자, 유월절의 실재이다. 그분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참여하기 위하여 계신다. 우리는 단지 형식적으로 그분을 기념해서는 안되며, 그분을 실재적으로 먹고 마시고 누려야 한다.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마가복음 14:43~15:15

성경모임 추구자료 (6)
2011. 10. 21(금)
교재: 성경(회복역) / 진도: 마가복음 14:43~15:15
[개요]

   IV. 하나님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노예-구주의 죽음과 부활(14:43-16:18)
    A. 그분의 죽음(14:43-15:47)
      1. 붙잡히심(14:43-52)
      2. 재판받으심(14:53-15:15)
        a.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14:53-72)
        b. 이방인을 대표하는 로마 총독에게 (15:1-15)


인자  

우리는 주 예수께서 거짓 고소를 받고 있는 동안에 잠잠하셨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분의 인격에 관해 그리스도 곧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주님은 찬송을 받을 자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자신을 인자로 언급하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이 땅에서 뿐 아니라 부활하신 후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편에서도(행7:56), 심지어 구름을 타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실 때에도 인자이시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은 사람이 되셔야 했다. 사람이 없이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에서 수행될 수 없다.

죽음의 과정을 통과함  

14장에서 주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서 심판을 통과하고 계시는 동안 베드로는 실패했다. 그의 실패에서 그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체험을 통과했다. 주님을 친밀하게 따르는 모든 자들도 역시 그분의 죽음 안으로 이끌려졌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로 인해 주 예수님이 그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었으며,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힘은 주님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의 죽음안으로 이끌려질 필요가 있었다. 이는 그가 너무도 천연적이기 때문이었다. 담대한 그는 항상 앞장을 섰다. 분명히 이런 사람은 못 박힐 필요가 있었으며 사실 베드로는 못 박힌 것이었다. 비록 그가 당시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주님의 죽음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나중에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한 후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 예수님은 승리에 찬 방식으로 죽음에 들어가셨으나 베드로는 실패하는 방식으로 죽음에 들어갔다. 이 실패는 베드로의 천연적인 존재를 드러냈으며 그것을 처리받을 수 있게했다.



주 예수님만이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신 유일한 분이 아니다. 베드로로 대표된 우리 모두가 주 예수님과 함께 이 과정을 통과했다. 당신은 자신을 베드로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는 드러나 심판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가 있는 베드로들이다.

마가복음 14:27~14:42

성경모임 추구자료 (5)
2011. 10. 07(금)
교재: 성경(회복역) / 진도: 마가복음 14:27~14:42
[개요]

   4. 제자들에게 경고하심 (14:27-31)
   5. 겟세마네를 체험하심 -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분부하심 (14:32-42)


주님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려짐 

마가복음 14장과 15장을 읽을 때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안으로 이끌려졌다는 것을 본다. 결코 주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베드로가 장담했을 때 그는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실족할지라도 자기는 실족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했다. 그는 계속하여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31)라고 했다. 그러나 장담한지 얼마 안되어 그는 완전히 주 예수를 부인했다. 주님을 부인한 후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14:72). 매우 참된 의미에서 이것은 베드로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그는 울었다.

그리스도의 재산출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죽음의 과정을 통과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주님의 부활과 승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가 오순절 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고 승천한 사람이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재산출이었다. 베드로는 이 그리스도의 복사판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안으로 이끌려진 베드로는 또한 그리스도로 적셔져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였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그가 되셨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오순절 날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복사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기록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재산출이 되기 위해 긴 과정을 통과했음을 가리킨다. 이 과정은 1장에서 어부인 베드로를 주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 시작되었다. 그를 부르신 후 주님은 베드로를, 완성되는 데 삼년 이상이 걸린 과정 안으로 이끄셨다. 결국 오순절 날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안으로 이끌려진 사람이 되었다.

새 사람을 산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새 사람을 산출하는 것임을 보았다. 새 사람을 산출하는 방법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대치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할 때 우주적인 대치이신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만유를 포함한 대치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할 때 항상 충돌과 핍박이 있을 것이다. 사탄이 옛 창조를 점령하고 있으며, 주님의 일을 반대하기 위해 옛 창조에 속한 자들을 부추기기 때문에 옛 창조에 속한 것들은 우리를 방해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치가 되지 못하게 한다.
먼저 그리스도는 유댜교에 속한 모든 옛 것들을 대치하신다. 우리는 9장과 13장에서 그리스도가 모세와 엘리야, 심지어 성전까지 대치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이방 세계에 있는 것들을 대치하신다. 그분은 문화와 관습과 습관들과 옛 생활 방식을 대치하신다.



그리스도가 이러한 대치이시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은 적극적인 목적에 이바지한다. 충돌을 통해 우리는 죽음에 넘겨지며 부활 안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핍밥과 충돌을 통해 대적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결국 부활 생명의 흐름이 해방되도록 도울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할렐루야, 새 사람을 산출하는 흐름은 하나님의 왕국이 될 것이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산출된다. 주님의 죽음과 부화을 통해 우리는 새 사람의 산출을 위한 만유를 포함한 우주적인 대치이신 그분을 누린다.

마가복음 14:12~14:26

성경모임 추구자료 (4)
2011. 09. 29(목)
교재: 성경(회복역) / 진도: 마가복음 14:12~14:26
[개요]
   3. 만찬을 제정하심 (14:12-26)


유월절의 대치

베다니에서 잔치를 누리신 후에 주 예수님은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시고 유월절의 대치로서 그분의 만찬을 설립하셨다(14:12-26). 주님은 그의 두 제자에게 유월절 잔치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도록 권하셨다(12-16절).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에서 그것은 유월절의 마지막 잔치였다. 왜냐하면 그때로부터 유월절은 주님의 상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옛 경륜이 새 경륜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대신에 주님의 상, 즉 주님의 만찬을 지킨다.

노예-구주를 기념함 

신약의 새로운 이 실행은 믿는이들을 위해 주신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고(고전 11:24) 그들의 죄들을 위해 흘리신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마심으로(마 26:28) 노예-구주를 기념하는 것이다. 떡은 생명(요 6:35), 즉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며, 잔은 축복(고전 10:16), 즉 그들의 분깃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시 16:5). 죄인들인 그들의 분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다.(계 14:10). 그러나 노예-구주께서 그들을 위해 잔을 마시셨고(요 18:11), 그분의 구원은 그들의 분깃, 즉 넘치는(시 23:5) 구원의 잔이 되었으며(시 116:13), 이 잔의 내용은 그들의 만유를 포함한 축복이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잔은 이러한 떡과, 그분의 믿는이들이 이 같은 잔치이신 그분을 누림으로 그분을 기념할 수 있도록 그분이 세운 상과(고전 10:21) 잔치인 노예-구주의 만찬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의 풍성과 기묘한 구원을 온 우주에 간증하며, 구속하여 생명을 분배하는 그분의 죽음을 전시한다(고전 11:26). 그분의 몸에서 분리된 그분의 피는 그분의 죽음을 표명한다.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이 됨  

주님의 상에 있는 떡은 우리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을 해방하려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찢기우신 그분의 몸을 상징한다. 이 생명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비밀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전 12:27). 이 또한 상에 있는 떡으로 상징된다(고전 10:17). 그러므로 이 떡을 취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을 갖는다.(고전 10:16).
주님은 그분의 생명을 해방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우셨다. 주님의 생명의 해방은 부활 안에 있다. 그러므로 떼어지는 것은 죽음의 문제이며 해방은 부활의 문제이다. 십자가 위에서 깨어짐을 통해 주님은 우리가 이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분 안으로 부터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실 수 있었다. 주님의 신성한 생명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비밀한 그리스도의 몸, 즉 그분의 확장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떡을 누림으로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이 됨을 가리킨다.
그분의 확장인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은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17절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상 위에 있는 떡으로 상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떡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을 갖는다.

피와 언약과 잔
주님의 피는 우리를 타락한 상태로부터 하나님께로, 즉 아담의 타락을 통해 우리가 잃었던 기업에로,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에로 구속했다. 주님의 상에 관하여(고전 10:21) 떡은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잔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누림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잔은 축복의 잔이라 불리운다(고전 10:16). 이 잔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분깃인 하나님 자신이 있다.(시 16:5). 아담 안에서 우리의 분깃은 하나님의 진노늬 잔이었다(계 14:10).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그 잔을 마시셨으며(요 18:11) 그분의 피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잔이 되었으며(시116:13) 넘치는 전이 되었다(시23:5). 이 잔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피의 교통을 갖는다(고전 10:16).

떡과 잔
주 예수께서 그분의 만찬을 설립하셨을 때 그분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14:22)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잔을 가지사 그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4절)"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상은 한 덩어리의 떡과 잔을 포함한다.
성경적인 용법에 의하면 떡은 생명을 상징한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35). 이것은 성경에서 떡이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더욱이 성경적인 용법에 의하면 잔은 축복의 분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잔은 축복의 잔이라 불리운다. 떡은 생명에 속한 것이며 잔은 축복에 속한 것이다. 확실히 이 생명은 신성한 생명이며 이 축복은 신성한 축복이다. 사실 생명과 축복은 삼일 하나님, 즉 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영원한 생명은 삼일 하나님이다. 당신은 신성한 축복이 무엇인지 아는가? 신성한 축복 역시 삼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축복은 사실상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축복이 됨
삼일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축복이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것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먹은 음식은 소화되어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된다. 어떤 것이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려면 그것은 유기적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돌멩이를 삼킨다면 그 돌은 당신의 생명 공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돌이 살아 있거나 유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유기적인 것만을 소화할 수 있으며 우리 안으로 흡수하여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게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 공급과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이 되려면 그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소화 흡수 되어야 한다. 확실히 삼일 하나님은 살아있으며 유기적이다.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하나의 떡 덩어리, 즉 생명의 떡이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떡 덩어리, 즉 생명의 떡이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51절), 그리고 그분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57절).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를 먹는 믿는 자마다 그분으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생명의 떡을 먹을 때 그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소화되어 유기적으로 우리 안으로 흡수 된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삼일 하나님은 유기적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와 바로 우리 영적 존재의 섬유질 안으로 흡수되어 우리의 생명 공급과 생명이 되신다.

주님의 상에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에 관한 깊은 의미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단지 그분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분이 겪으신 것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러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로써 우리는 주님을 합당하게 기념하는 것이 그분을 먹어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그분을 취하는 것임을 본다. 상위에 있는 떡은 우리가 분석하거나 그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떡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취하여 먹기위한 것이다. 이 떡은 소화 흡수되어 바로 우리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의미는 심오하다.
주님의 상의 떡을 먹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들어오며 사실상 그분이 우리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먹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먹은 음식이 결국 우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음식이 우리가 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음식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와 우리가 먹어 소화 흡수한 음식사이에 유기적인 결합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안으로 흡수된 음식과 연합된다.

내적인 부활을 체험함



우리는 주님의 상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과 그분의 증가인 그분의 비밀한 몸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주님의 상이 그분의 부활과 관련이 있는가?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을 먹어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분을 소화 흡수 할 때마다 우리는 내적인 부활을 체험한다. 우리는 물질적인 음식 먹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때때로 나는 저녁이 되기 전에 피로하고 약해진다. 그러나 영양이 많은 음식을 먹은 후에 나는 다시 살아난다. 나는"부활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내가 먹은 음식은 나를 소생시키는 생명의 본질을 담고 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우리가 주 예수를 먹을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부활 생명이 되신다.

마가복음 14:01~14:11

성경모임 추구자료 (3)
2011. 06. 10(금)
교재: 성경(회복역) / 진도: 마가복음 14:01~14:11
[개요]
   2. 음모가 꾸며짐, 배반당하심, 사랑받으심 (14:1-11)


주님을 사랑할 기회를 붙잡음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은 교회 생활의 축소판이다. 이 축소판에 의하면 교회 생활은 주 예수를 사랑하는 깨끗케 된 문둥이들로 구성된다.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시몬과 그분께 기름을 부었던 여인이 했던 것처럼 그분을 그들의 완전한 대치로 취한다. 그들의 마음에는 성전을 위한 여지가 없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에 의해서도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5절).
거기에 있던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4-5절) 분낸 자들은 주님께 드리는 여인의 사랑을 허비라고 생각했다. 지난 십 구세기를 통해 수천의 귀한 생명들과 마음의 귀한 보물들과 높은 지위와 황금같은 장래들이 주 예수 위에 "허비"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분만이 사랑스럽고 그들의 예물을 드리기에 가치가 있다. 그들이 그분께 부어드린 것은 허비가 아니라 그분의 달콤함을 간증하는 향기였다.

교회생활에서 우리의 대치이신 그리스도

 
우리는 13장에서 주님이 그분의 죽음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14장에서도 이 준비를 계속했다. 주님의 준비는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새 사람을 산출할 것인가를 계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새 사람의 출생은 산고의 고난을 요구한다.

마가복음 14장에서 주님은 그들의 사랑을 누리심으로 계속하여 제자들을 준비하셨다. 깨끗케 된 문두잉들로 이루어진 집에 들어가면서 그분은 잔치와 아울러 기름 부음을 누리셨다. 잔치는 내적인 만족의 문제이며 기름 부음은 달콤한 향기로 주님께 문언가를 부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주님은 만족하셨으며 기름 부음 받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아닌 그분을 사랑하는 자 중의 하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주님은 모든 것을 대치하셨다.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 안에, 그들 주변에 그분 외에 아무것도 어떤 사람도 갖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직 이 놀라운 인격, 그들에게 모든것 되신 분만 있었다.

우리는 14장 1절부터 11절에서 교회 생활의 축소판을 갖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별히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대치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체험의 축소판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축소판으로 묘사된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의 대치이신 그리스도를 갖는다. 교회 생활 안에 있는 우리는 그분에 의해 께끗케 된 문둥이들이며 우리 마음 안에는 그분만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안에 , 우리 주위에 우리와 함께하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을 모든 것으로 취한다.




노예구주를 따르는 자들 중 하나가 그분께 그녀의 사랑을 최고로 표현하는 동안 다른 자는 그분을 배신하려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분을 귀히 여겼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은 그분을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13:01~37

성경모임 추구자료 (2)
2011. 06. 02()
교재: 성경(회복역) / 진도: 마가복음 13:01~13:37
[개요]
D.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을 예비시키심
   1. 다가올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심 (13:01-37)


장차 될일 

그분의 죽음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하시면서 노예-구주는 13장에서 그들에게 장차 될 일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후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 시대 동안에 세상에서 발생할 일들이다. 이는 주후 70년에 발생할 성전의 멸망과(1-2절) 그분의 부활 후에 시작하여 대환난 때까지 계속될 산고의 시초에 있는 재난과(3-8절) 교회 시대에서의 복음 전파와 핍박(9-13절), 이 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에 있을 대환난과 그분의 다시 오심(14-27절), 교회 시대 전반에 걸쳐서 깨어 기도하며 노예-구주를 기다리는 것이다(28-37절). 빛 비추는 이같은 말씀은 고통 당하며 노예-구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날이 샐 떄까지 어두운 데서 빛나는 등불과" 같다(벧후1:19).
 복음전파와 핍박의 고난
당신은 지난 천 구백여 년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각 세기는 복음 전파와 고난을 통한 새 사람의 분만을 증거한다. 우리는 왜 새 사람이, 핍박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복음 전파에 의해 출생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타락한 때로부터 옛 창조는 하나님의 대적 사탄의 강탈하는 손 아래 있어 왔다. 하나님은 이제 그분의 옛 창조로부터 새 사람을 산출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나 대적은 이같은 일들을 허락하길 원치 않으므로 모든 것들과 모든 문제들을 동원하여 새 사람의 산출을 방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경륜을 거스른다. 이러한 이유로 핍박이 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어선 때로부터 이러한 핍박은 계속 일어났다. 핍박은 먼저 그들의 종교를 갖고있는 유대인들로부터 왔으며 정치 안에있는 로마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자들에 대한 핍박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 천 구백여 년 동안 두 가지 일이 계속되어 왔는데, 이는 복음전파와 핍박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끝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다. 역대로 주님의 신실한 자들은 어떤 대가, 심지어는 그들의 목숨도 불사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한편 옛 사람과 그 사회와 문화로 된 옛 창조를 점령하고 있는 사탄은 대대적인 핍박을 감행했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사탄의 반대는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그 결과는 사탄이나 세상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궁극적인 결과는 새사람의 완전한 분만이다.




새 사람의 출생을 위한 긴 과정 후에 주 예수는 성도들이 휴거될 때에 새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휴거가 있을 것이며 이 휴거가 새 사람의 분만을 마무리할 것임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보고 마가복음 13장을 다시 읽는다면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신선한 빛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 주님은 그분을 친밀하게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러한 이해 안으로 이끌고 계셨다.

그 영

그 영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의 온 존재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성취하시고 획득하시고 달성하신
모든 것을 적용하신다. 이처럼 그분은 한 신성한 적용이 되셨다. 아버지는 경륜을 세우셨고,
아들은 그것을 성취하셨으며, 그 영은 아들께서 성취하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그 영은 적용이시다.

마가복음 11:27~12:44

성경모임 추구자료 (1)
2011. 05. 25()
진도: 마가복음 11:27~12:44
[개요]
C. 시험 받으시고 검사받으심 (11:27-12:44)
1.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에게 (11:27-12:12)
2.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에게 (12:13-17)
3. 사두개인들에게 (12:18-27)
4. 한 율법학자에게 (12:28-34)
5. 모든 사람의 말문을 막으심 (12:35-37)
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심 (12:38-40).
7.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심 (12:41-44)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의 이 기간 동안에 노예-구주는, 복잡하고 간교한 질문을 함으로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노력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첫 번째로 유대 종교의 권위를 대표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그분의 권위에 관해 주님께 질문을 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에 따른 질문이었다. 두 번째로 근본주의적인 바리새인들과 정치적인 헤롯 당원들은 그분께 정치와 관련된 질문을 했다. 세 번째로 현대주의적인 사두개인들은 그분께 근본적인 신앙, 특별히 부활에 관계된 신앙에 관해 질문을 했다. 네 번째로 서기관, 즉 율법사는 그분께 성경해석과 관련 있는 질문을 했다. 그들의 모든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신 후에 주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질문하셨다. 그들의 질문은 종교와 정치와 신앙과 성경해석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분의 질문은 그리스도, 즉 모든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의 중심이신 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와 신앙과 문자로 된 성경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12 35절부터 37절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질문을 하셨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물으신 후 주 예수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윗의 성령 안에서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바 아래 둘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주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것이니, 그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이시며,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단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부분적인 성경 지식밖에 없었다. 즉 그분이 그분의 인성을 따라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밖에는 몰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나머지 부분을 알지를 못했다.
헛된것과 실제의 대비
그분은 제자들에게 공허하고 헛된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과부의 내적 실제를 높이심으로 그들을 격려하셨다. 서기관은 공허하게 말하는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어떤자이며, 이 과부는 내적 실제를 갖고 있는 믿는이를 상징한다. 이 사건들을 상고할 때 우리는 서기관이 되는 대신에 가난한 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서기관들에게는 공허함과 헛됨이 있으며 과부에게는 내적 실제가 있다. 우리는 실제를 귀히 여기고 공허함을 주의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뛰어나게 말을 잘하며 웅변적이고 지식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공허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이는 가난하나 실제로 충만할 수가 있다. 돈의 문제보다 더 믿는이들의 내적 실제를 입증하는 것은 없다. 돈이 믿는이들의 내적 실제를 입증하는 이유는 인간 생활에서 돈이나 물질적인 소유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돈과 물질은 당신에게 하나님께 대한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한다

하나님게 있어서의 의(義)란?

그영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고 일하시는 것을 체험한 결과로 우리는 의롭게 된다.
자연히 우리의 속 존재는 투명해지고 맑아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된다.
즉시 우리는 노력 없이도 주님의 생각을 알게되며 그분의 뜻과 일에 관하여 분명한 이해를 갖게된다.
그럴때 우리가 행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과 뜻을 따르게 된다. 이것이 의이다.

십자가를전하는길

우리는 그분의말씀을 부주의하게 또는 어리섞게 전하지말아야한다 오히려우리는 우리가 부득불 말해야만 할정도로 그분의말씀이 먼저 우리 영안에서불타게 해야한다

안식일을 지키는것과 금식의 내재적 의미

-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행함을 멈추면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치물로 취하고, 그리스도 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입맛을 갖지 않는 이 한가지 공과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이사야 55:1~3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들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혼이 살리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영원토록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해고되고 대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일을 멈추고, 우리의 의도를 그치며, 우리가 해고되고 대치됨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결과 우리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사시는 것이다.(갈 2:20)

성경에 따른 금식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금식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식욕만을 가지며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도 먹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일하고 먹는 일에 바쁘기 때문에, 마음안에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여지나 존재 안에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역량을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쉬어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금식해야 한다.
안식하고 금식함으로써 우리는 과정을 거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것에 참여할 수 있다.



총체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은 다만 신성한 물이며, 이 신성한 물은 바로 우리가 마시고 누리기 위한 완결되신 영이다.

안식일을 지키는것 (이사야 58장)

하나님은 하나의 경륜을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과 전부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행함을 멈추고 그리스도외의 그 어떤것에 대해서도 입맛을 갖지 않는 이 한가지 공과를 배우기 원하신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로 대치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누려야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목적이다.

안식일을 지키는것은 우리자신을 멈추는 것이다. 안식일에 금식하는것은 기존에 자신이 먹던 많은 음식들(텔레비전, 스포츠, 음악, 잡지, 세상적 오락들)
을 멈추고, 그리스도 즉 하나님자신만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는 그리스도 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이것이 바로 참된 안식일의 의미이다..

철근배근예시(D22보강근 최대한 촘촘하게 넣을 경우)

철근배근예시

철근배근예시(D22보강근 2대를 최대한 촘촘하게 넣을 경우)

골재가 들어가는 최소 너비: 25mm(20mm로 보는 현장도 있음)

(오프닝)|<--25mm(피복두깨)-->|<--22mm(철근)-->|<--25mm(골재채움)-->|<--22mm(철근)-->|<--25mm(피복두깨)-->|(오프닝)




총 길이: 25+22+25+22+25=119mm 소요

지하층단열재설치시 주의사항(콘크리트방수한계)



에너지절약계획상 건축물의 단열재는 지상층기준아래로 2m아래로 단열재를 설치하게 되어있으나
그림과 같이 외단열로 처리할경우 다공질단열재를부착할경우 습기가스며들어 단열재성능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지층외단열 처리시에는 반드시 단열재에 PE필름처리를 하던지 아니면, 무근처리를 하던지 해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일반적으로 콘크리트의 경우 70mm이상 물이 스며들지 못하므로 그 이상의 두깨로 처리하면 특별한 방수재처리를 하지 않아도 무관하다.

방사능치료시설설계시 차폐 콘크리트제염설계



방사능관련시설 설계시 주의사항.

중입자가속기나, 양성자치료센터, 등과 같이 특수방사능 치료센터가 속속들이 국내에서 오픈되고 있다.
특수방사능설비를 설계할 경우, 차폐가 매우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콘크리트 자체는 차폐성능이 있으므로, 덕트나 배관, 그리고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구를 제외한 부분은 특별한 차폐재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혹여나 모를 방사능물질 누출의 경우 장기간의 사용시 콘크리트 표피에 방사능물질이 누적오염되게 되면, 반드시 제염작업을 하여야 한다. (2차오염방지를 위해)

문제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콘크리트 내부에 들어있는 철근인데, 일반적으로 한국구조설계기준에 따른 콘크리트 피복두깨를 따라가게 되면, 제염의 어려움이 따르므로, 세밀한 검토를 통해 피복두깨를 더 두껍게 설계하도록 고려하여야 한다.

2015년 2월 16일 월요일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classic travel]-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 바흐(bach)와 헨델(handel)(하)


스무명의 자녀를 둔 바흐 / 평생 독신으로 지낸 헨델

 바흐는 두번결혼하여 총 20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번째 부인은 7명의 자녀를 낳고, 결혼 13년차에 세상을 떠났다. 두번째 아내는 전 부인의 자녀 7명에 추가로 13명의 자녀를 낳고 그들 모두를 훌륭하게 돌보면서도 남편의 악보정리까지 해 냈다. 스무명의 자녀가있는 왁자지껄한 집안분위기속에서도 바흐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쳐 대부분이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중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런던의 바흐'라고 불릴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헨델은 한군데 정착하는걸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생의마감

두사람은 같은 돌팔이 의사에게 눈 치료를 받고 실명하게 되었다. 헨델은 평생 왕의 총애를 받다가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예를 받았지만, 바흐는 죽어서도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가난한 탓에 자녀들은 바흐의 악보를 헐값에 팔았고, 그의 악보들은 여러군데로 흩어지게 되었다. 후에 맨델스존이 바흐를 재평가 하여 널리 알리면서, 완전히 재평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크음악

바흐와 헨델은 고전파 음악의 창시자라고 할수 있다. 당대 사회문화는 바로크양식이 흥황할 때였는데,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루투갈 단어로, 르네상스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 바로크양식이 어떻게 비추어졌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바로크는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갖는데, 17세기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탐험과 항해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탐험과 항해술의 발달은 천문학과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지구가 크고 세상은 넓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더 큰 건물과 더 웅장한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종교적으로는 기존 천주교의 부패에 대항하여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천주교는 기존보다 더 크고 웅장한 성당을 짓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바로크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음악은 프랑스, 영국, 독일등 유럽각국에 영향을 끼쳤고, 프랑스에서는 오페라와 발레가 전성기를 누렸으며, 독일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작곡가들의 종교음악 칸타타, 푸가등이 발전되었다.

바로크음악의 특징

바로크음악은 기존의 종교 및 성악중심의 음악이 기악중심으로 전환된 것이 특징이다.
소규모 연주회가 대규모 연주회로 변화됨에 따라 악기의 종류도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다성음악(polyphony)의 시대가 도래되었는데, 이는 두개이상의 선율을 동시에 노래하여 결합하는데 대위법(counter point)라고도 한다. 바흐의<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나, 헨델의<메시아>같은 곡을 들어보면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곡과는 다르게 복잡함이 느껴진다.





추천음악

바흐-이탈리아 협주곡(Concerto Italian)


바하의 곡중 대위법의 강박을 벗어나 비교적 편하게 들을수 있는 곡이다. 여느 바하의 곡처럼 무겁거나 엄숙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다가갈수 있는 곡이다.

특히 글렌 골드(Glenn Gould)는 바흐전문가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바흐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린 연주가로 정평이 나 있다. 물론 괴짜스런면은 있지만 말이다..






헨델-오페라<세르세>중 '라르고'


주인공 페르시아의 왕 세르세가 뜰에 나와 무성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부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리아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