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4일 토요일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핵심조건 - 찬양[출애굽기 15장 1절~18절-모세의 노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핵심조건 - 찬양






왜 찬양인가? 노래는 이기고 난 후에 부르는 것이 아닌가? 단지 찬송부르는 것으로 이길수 있다고?


이러한 질문조차도 사실, 우리 스스로가 하는 질문이 아닌 대적의 질문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대적은 매우 영리하며, 모든 말과 행동에는 목적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의 아버지로써, 속이는 자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표를 상실케 하고 좌절케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뱀의 모양으로 하와에게 접근하여 사탄이 했던 말이 바로 "하나님이 정말 그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던가? 정말?, 아니야, 사실 그걸 먹으면 니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단다"였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선악과 나무가 아닌 생명나무를 먹는 것이었지만, 사탄은 오히려 선악과를 사람이 먹기를 원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의심케 하는 질문을 했던것이다.

같은 취지로, 찬양을 꼭 해야만 할까? 라던지 찬양은 니 상황이 좋아지던가, 하나님이 네게 좋은 것을 주시면 그때 하라..라는 식의 논리는, 확실히 사탄이 넣어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이기고 난 후 찬송을 부르는게 아닌, 찬송을 불러서 이겨야 하는 것일까? 여기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관련 구절들을 보자.

출애굽기 15장은 이집트에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파라오의 군대가 수장되는 것을 본 후 모세의 주도로 지어진 찬양이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 되었다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 그분을 찬양하리라.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나 그분을 높이리라." 이어서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전사이시니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라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중점이 있다. 사실 홍해를 건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싸움에 개입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이집트 군대와 싸운적이 없었다.
 
3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싸움은 전사이신 여호와께서 직접 수행하셨다. 결국 영적 전쟁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패배하게 된다. 즉 우리는 여호와께서 싸우시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이어서 17절과 18절을 보자. "주님은 그들을 데려다가 주님의 유업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오, 여호와님! 그곳은 주님께서 거하시려고 만들어 놓으신 곳입니다. 오, 주님! 그곳은 주님의 손으로 세워 놓으신 성소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히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본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결국 여호와께서 영원 무궁히 다스리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 찬송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여호와 이시며, 그분이 전사로써 싸우셨으며, 또한 그분이 그들을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땅 또한 시온에 넣으실 것이며, 그곳에서 그분은 그분의 거처인 집과 왕국을 확보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민족을의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임을 말한다. 이러한 찬송을 그들에게 기념이 되고, 또한 광야를 통과하면서, 계속적인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찬송은 그분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고 계속 승리토록 하시는 것이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과 전투를 벌일때, 많은 경우 무기 없이 찬송만을 가지고 승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한번 상기하여야 할 중요한 내용은 싸움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싸워 이기시도록 해 드려야 한다. 싸움의 주체는 바로 그리스도 이시다. 이러한 구약의 원칙을 볼때, 싸움에서의 승리의 원칙은 찬양이다. 승리는 우리의 찬양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심으로 얻어진다. 찬양이 우리의 승리의 수단이므로, 원수는 찬양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마치 원수가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까, 극도로 두려워하여, 선악과의 나무를 먹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는 또다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대적은 찬양을 극도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우리가 기도할때, 우리는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있다. 그것은 원수가 기도를 두려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중간에 생전 전화하지 않던 사람이 전화를 한다던지, 갑자기 누가 방문을 한다던지 하는 것은, 대적이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대적은 믿는이들의 기도를 방해한다. 하지만, 대적은 찬양을 방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찬양은 모든것들로 부터의 초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찬양을 할때, 우리는 모든 방해와 어려움들로 부터 일시에 초월하게 된다.

당신 스스로 자문해 보자. 지난 한달간 얼마나 많은 찬송을 불렀는가? 많은 찬송을 불렀을 수 있다. 어떤 찬송에서는 "온종을 주께 노래하며~"라는 구절이 있다. 온종일은 아니더라도, 단 3분이라도 지속적으로 찬송을 불러본 횟수가 얼마나 되는가?

어떤 기도모임에서는 많은 기도가 있으나 찬송이 없다. 기도는 방해받을 수 있지만, 찬송은 방해받을 수 없다. 찬송은 모든것을 초월한다. 찬송가를 펴 보면 거기에는 많은 주제에 관한 찬송들이 있다. 우리는 찬양의 내용을 알고 다양한 주제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승리에 관한 다양한 주제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 그럴때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온땅에 수많은 주일예배가 있지만,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찬양이 있는가? 또한 얼마나 찬양을 높이 올려지는가? 찬양을 부를수 있지만, 그 찬양이 얼마나 높이 올려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세번씩 선포지만, 대적은 그걸 비웃을 것이다. 형식적인 말은 필요없다. 한번의 높여진 찬양이면 족하다.

​생명의 분량이 많고 적고를 떠나 우리는 누구나 찬양할 수 있다. 누구나 생활가운데 1~2분씩 찬양할 수 있다.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찬양하라. 현재 자신의 누림을 찬양하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찬양하라. 찬송을 펴서 그 자리에서 관련된 찬양을 하자.

몇년전 프랑스에서 만났던 한 형제님의 말이 기억이 난다. 그 형제님은 전혀 주님을 모르고 있다가, 필리핀으로 잠시 여행차 왔던중, 섬으로 떠나고 있던 배 위에서
한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매료되었다. 필리핀 마닐라 교회의 젊은 성도들(주님께 전시간으로 훈련을 받고 있던 지체들)의 찬송을 듣고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궁금해서 몇마디 물어보고 답변을 듣던중 구원 받았다. 찬송은 승리를 가져온다. 만약 그때, 그 성도들이 프랑스 형제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다면, 그는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찬송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찬송에는 이기는 능력이 있다.

찬송은 주님의 승리에 관한 내용이어야 하고, 그러한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기분이나, 우리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우울하던 기쁘던, 주님은 이미 승리 하셨다! 어떤 불확실성이 있던, 어떤 상실감이 있던, 어떤 공격이 있던 일단 찬양하라. 그러면 당신의 패배된 상황은 승리로 바뀔것이고, 당신의 우울한 감정은 기쁨에 찬 감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이 당신의 상황을 바꾸어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을 읽어보자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제물,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여기서는 찬양을 희생제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게 좋은 일을 당했거나, 승리를 했을때, 찬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났거나, 원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을때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다. 히브리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찬양은 희생제물로써, 거기에는 희생과 상실과 시험이 있다. 즉, 우리는 쉽지 않은 상황가운데 찬양을 함으로써, 일종의 희생을 드리고, 시험이 있더라도 그 시험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찬양이다. 찬양은 우리의 상황이 좋을때 하는 것이 아니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희생제물로써 찬양을 드리는 것을 배우자. 상황이 바뀔것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 상황이 개선될 것에 대해 기대하며 찬양을 하지 말라.

기본적으로 영적전쟁에 대해 우리가 서 있을 수 있는 기반은 찬송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우리를 공격한다. 이것은 엄청난 충돌이다. 우리가 숨도 쉴수 없을때, 기도할 힘조차 없을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찬양할 때이다. 나는 나도보지 않고, 너도 보지 않고, 오직 보좌에 계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의 승리를 선포한다. 나는 나의 힘으로 너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나는 기도로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를 선포함으로 성취한다.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을 보자
이 장은 대환란의 후기에 이기는 믿는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짐승의 형상과 짐승의 이름의 숫자를 이기고 벗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수금을 가지고 유리 바다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예인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말하였습니다."전능하신분 주 하나님, 주님의 일은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민족들의 왕, 주님의 길은 의롭고 진실합니다!. 오 주님, 누가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겠으며 영광스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이 섞인 유리바다과 같은 것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불못을 초월한 이기는 믿는이들 곧 대환란을 극복하고 적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으나 부활한 이기는 믿는이들을 가리킨다. 그때 주님은 그들을 구출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어떠한 것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찬양했다. 그들은 두가지를 찬양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길을 찬양했다. 주님의 길은 우리를 그분이 일하실때 취하시는 그분의 원칙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신일만을 찬양한다. 그러나 하늘이 침묵할때,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것 처럼 보일때,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길을 알았고, 그분의 일의 원칙을 알았고, 그분이 의롭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이렇게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아무행동도 취하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당신이 원수를 처리하실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하실때에 당신을 찬양하지만, 당신이 침묵하실때 더욱더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한무리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찬양의 이러한 진보가 있어야 한다. 그분은 찬양이 이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을 가지셔야 한다."

둘째는 주님의 일을 찬양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찬양은 진보할 필요가 있다. 주님이 주신 일에 대해 찬양하는 것은 쉽다. 축복받았을때 하는 찬양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우리가 고난받고 치료가 없고 공급이 없고 상황이 비관적일때 하는 찬양은 승리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이러한 찬양을 필요로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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